지극히 주관적인 생각

무소유하는 스님도 돌아갈 절이 있다. 내집마련은 필수다. 이말이란다.

덜소유구도자 2021. 11. 4. 17:31

자, 여러분 모두들 한 목표를 바라보고 너무 열심히 살았어요.

오늘은 저와함께 잠시 한눈좀 팔다가 옵시다!!

우리는 최대한 소유의 개념은 버리고 존재의 개념으로 살아숨셔야합니다.

서울에 내집마련하는게 끝판왕은 아니잖슴~

 

자본주의에 살면서 자본주의를 무시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거는 우리가 "지구"라는 곳에 살아간다면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하려면 자발적 베어그릴스나 자연인이 되어야합니다.

밧뜨!! 자연인도 오리지날로 자연인일 수가 없습니다.

핸드폰 충전을 하더라도 전기세를 내고 전기를 이용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야산에 숨어들어가서 나무를 캐서 불을 떼며 살아도 산주인에게 걸리면 재물손괴로 물어줘야겠죠?

 

우리 사는 세상이 이데아, 유토피아, 극락, 천국 뭐 이런게 아니니까요.

우리가 "지구" 라는 곳에 이 땅위에 발을 붙이고 살아간다면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법칙인데요.

자본주의라는 것은 자연의 섭리는 아닙니다. 진리나 원칙은 아니죠.

하지만 우리가 통상적으로 따르는 기본 상식이고 깔린 배경입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먼저 이 얘기를 하나 소개시켜드리고 싶습니다.

 

전체는 하나, 하나는 전체

강철의 연금술사의 애드워드 앨릭과 알폰스 앨릭 형제의 스승인 이즈미는 불교적 가치관(그러나 범종교적인)을 진리로 사사하는데 그것은 바로 "전체는 하나, 하나는 전체" 라는 워딩입니다.

 

저는 제가 주장하는 " 야, 무소유도 내집마련은 필수다. " 라는 명제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점점 포커싱을 집중해서 설득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존재합니까?

 

우주

대충 우주에서 우리은하의 어딘가에서 돌고있겠죠.

우리는 우주에 존재합니다.

우주라는 관점에서 보면 당신은 하등 그냥 발에치이는 먼지쪼가리일 뿐입니다.

당신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말도 안되게 허무할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은하의 지구에서 태어나고 뒤집니다.

 

 

지구

자 이게 뭐죠? 지구죠.

우리는 우주의 거대한 공간에서 이 지구에 살고있습니다.

지구에서 보아도 당신의 존재는 허무하기 짝이 없을정도로 작고 발에치이는 개미정도는 될 것 입니다.

 

당신은 밖에나가서 무심코 개미를 밟아죽이고 지나가도 신경 1도 안쓸 자신 있을 겁니다. 맞죠?

 

지구에서 보면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지 지금 이순간에도 세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그게 내 형제나 이웃이 아니라면 관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내 가족이나 이웃에서 사람이 태어나거나 죽는다면 크게 마음이 쓰일 것 입니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면 내가 싸이코패쓰인가 싶을정도로 마음이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옆에서 누가 총맞아 죽는다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그 처참한 몰골을 발견하면 나 자신은 정신병까지 올 수 있다는 거죠.

제가 이렇게 조금씩 당신 옆으로 갈 것 입니다.

 

 

코리아

뭐 어딘지는 모르겠습니다. 대충 보면 한국인건 아시겠죠?

80억의 지구인이 살고 있는 지구에서 200개국중에 1개국인 ROK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1특별시, 6광역시, 8도, 1특별자치도, 1특별자치시 중 하나에 살고있죠.

당신이 대한민국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52,000,000 입니다. 52,000,001명이든 52,000,002명이든 별로 신경도 안쓰이는 숫자에 불과한 부분을 차지하고 계시는 겁니다.

 

세계인구에서 보면 7,874,965,732 명중에 1을 차지하고 계시는 거죠.

너무 작아요. 너무 작아서 7,874,965,732명이나 7,874,965,733명이나 별 차이가 없게 느껴져요.

근데 7,874,965,732 명이 바로 지금 이 순간 7,874,965,731 명이 되어야 한다면

숫자 1 하나 빠지는 것 입니다.

너무 작은 비중이죠.

 

그러나 그게 당신이어야 한다면요?

 

매 1분 마다 7,874,96.. 너무 많으니까 네자리만 합시다.

매일 아침 8시에 7874명중에 한명이 죽고, 한명이 태어난다고 쳐봅시다.

 

1/7874에요. 0.012%에요.

 

너무 작죠.

죽을확률이 0에 수렴한다고 우리는 얘기합니다.

근데 내가 당첨된다면?

 

100%죠.

 

이게 "전체는 하나이고, 하나는 전체의 개념" 이 시사하는 의미이자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확률을 없애거나 최대한 덜어내려고 하거든요. 그것은 "위협"으로 감지되니까요.

 

 

 

 

내가 어느날 집도 절도 없이, 가진것 한푼 없이 이 세상에 버려진다고 가정해봅시다.

과연 살아남을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될까요.

더구나 이 도시화된 세상에서 길바닥에 때마침 감나무가 열려있어서 감을 따먹고 끼니를 채울 수 있을 확률이 얼마나될까요.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살아남기란 쉽지 않을겁니다.

누군가에게 빌어서, 또는 훔쳐서 또는 숙식제공되는 노가다를 뛰어서..

그 시작은 꽤 거칠지도 모르고, 큰 용기가 필요하고, 상실감에 주저 앉아버릴수도, 의지를 가지고 계속 살아갈수도

너무나 많은 변수들이 한꺼번에 밀려와버리죠.

갑자기 몰려온 상황에 너무 불안하고 손이 떨려서 길모퉁이 전봇대 옆에 주저 앉아버렸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이런 상태에 놓였을 때, 즂됐다 라는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마음일 뿐이지만 앞으로의 상황이 나의 마음과 선택과 행동에 따라 아주 작은 눈빛, 말투 따위에도 쉽게 바뀌어지겠죠.

 

근데 전봇대 옆에 작은 박스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456억원이 현찰로 들어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작은 편지가 적혀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정재입니다. 이돈을 줍는다면 그냥 쓰세요. 저는 모든게 필요없어졌습니다. "

 

평생 놀고먹을 만큼의 돈이 들어온다면 선택하고 싶은 직업 1위가 "여행가" 이더만요.

43% 득표율로요.

전국을, 세계를 유랑하기에 충분한 꽁돈이 생겼네요.

 

심장이 쿵쾅쿵쾅 뛰겠죠?

꽤 기쁜 마음으로 그 돈을 들고, 자릴 박차고 일어날 수 있겠죠?

 

이정재가 누구인지, 오징어게임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요.

잠시 그런 생각이 스치기엔 충분한 돈일거에요.

 

 

 

자본주의에서 돈이라는 개념이 전부인 것 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유입니다.

이 세상 모든일은 "사실" 마음먹기 나름인데

우리는 이 마음에 포커싱하지 않고,

돈이라는 "수단"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돈이 아닙니다.

엄밀히 따지면 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돈을 사용하지도 않았고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통장 계좌에 단지 456억이 꽂혔다는 사실만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안심"했고, "희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근데 보세요.

 

오일남은 456억을 이정재에게 줬고,

이정재는 456억을 버렸습니다.

미친사람들일까요? 아니죠. 

 

진리의 문

 

진리를 들여다 본 사람들이죠.

 

돈이라는게 딱 그정도 의미라는 걸 알게된 사람이에요.

결국 돈을 많이 가져보면 돈이 많이 필요없다는 것도 비로소 알 수 있게되는거에요.

그러나 오일남과 이정재가 아무리 사람들을 붙잡고 얘기해봤자

우리는 와닿지 않을거에요.

 

그래서 미디어와 매체, 종교 등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왜냐면 이웃을 돕고, 나누고, 공유하는 이 행복한 과정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은거죠.

 

저는 오징어 게임이 그런 메세지를 전달해줬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관통한 이 메세지는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죠.

우리는 사실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죠.

더 좋은 것을 찾다보면 끝이없고, 비교하다보면 상대적 박탈감 또는 우월감인데 인간에게는 둘 다 너무나 유해한 감정선이다.

 

우리는 다른 관점으로 집을 봐야합니다.

"안심"하고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수단은 돈이 아니어도 마음이 움직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찾은 방법은 덜소유하고 존재하기 입니다.

 

 

 

이 전체적인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는 누구냐 바로 "나 자신" 입니다.

나 하나가 이 세상 전체를 인식하는 것 입니다.

이 세상 전체에서 나 하나는 너무나 작고 먼지같은 존재이지만

" 나 자신 " 이라는 세상에서 " 나 " 는 전부입니다.

" 나 자신 " 이 " 세상 " 이라는 잊어서는 안되는 명제이죠.

 

 

나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요?

저는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하려고 사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근데 보세요.

집도 절도 없으면 어떻게 되나요?

위에서 따라오셔서 아시겠지만 전봇대 옆에 쭈그리고 앉아야 되는거에요.

456억이고 나발이고, 누군가 간밤에 술에취해 붙여놓은 빈대떡이 있겠죠.

이것은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겠죠.

 

나 자신은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어딘가에 머무르거나 잠시 쉬고 싶어도 무조건 돈이에요.

옷을 입는 것도 돈이고, 밥을 먹는 것도 돈이고, 집에 앉아있는 것도 돈이에요.

야생으로 나가고 싶어도, 큰 용기를 내도 결국엔 돈의 문제에 부딛히게 됩니다.

고로 돈이 많을수록 위협에서 멀어진다는 생각들이 지배적으로 자리잡게되면서 안정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죠.

사실 움직이는 행위 자체가 끊임없이 변수를 만들어내기에 단어 그대로 안정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움직여야만 안정이 찾아온다는게 자본주의의 정설이 된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은 이제는 없다고 치부할 수 없는 수단이 되어버렸어요.

 

그것이 주의가 되어 자본주의라는 보편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인정할 줄 알아야해요.

 

아 내가 돈이 있어야 되는구나... 

 

내가 돈이 있어야 머무르고 존재할 수 있구나...

 

 

슬프네요.

 

음, 찾아보면 공짜로 머무를 수 있는 곳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설 역시 누군가의 돈으로 운영되고 있기에 탈출은 불가합니다.

 

집은 왜 필요한가요?

안전을 위해서죠.

길바닥에서 잠을 잘 수 있지만,

그나마 있는 것도 털릴 수 있고, 추위나 더위에 쉽게 노출되고,

병이나 바이러스 등에 노출되고, 강도를 당할 수도 있고, 너무나 위험이 많죠.

그냥 쌩 야생이에요.

 

우리는 집에 있을 때 안전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안정감을 느껴야 넥스트 스텝을 밟을 수 있는 "여유" 라는게 생겨요.

근데 자본주의에서 땡전한푼없이 아무리 합리화를 해도 안되는게 결국엔 이런 이유였죠.

 

내가 돈이 있어야만 하는구나.

돈은 없을 수가 없구나.

 

 

우리는 스스로 만족할만한 충분한 돈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근데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르단 말이에요.

누구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어야 만족하고,

누구는 피라미드 최하층에 있어도 만족한단 말이에요. (확률적으로는 더 쉬운길이죠)

 

하지만 피라미드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죠.

어딘가에선 살아숨셔야되니까.. 그래서 내집마련은 필수라고 말씀드린거에요.

 

우리 지구에는

* 아무리해도 30밖에 안되는 사람인데 한계는 없다고 생각하고 40, 50 뚫고 올라가는 세상도 있고,

* 죽을 똥 싸서 50에 와서 만족하고 사는 세상도 있고,

* 30을 할 수 있어도 조금만 노력해서 20만 하고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세상도 있고,

* 20을 하면서 30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세상도 있고,

* 100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아직은 노력중이라 30에 있는 세상도 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세상에서 만족과 행복이라는 정의는 모두 다르고,

그걸 수치화하여 20, 30, 50, 100이라고 표현해보았으나 결국 모든건 내가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결정된다.

 

계급이 있고 없고의 논제를 떠나서 피라미드(거주를 위한)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내가 탑층에서 불만족한다면 지하층에서 풀만족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

그것은 다른 층의 삶일 지라도 질적으로 너무나 양극화된 세상이라는 것

각기 다른 층을 바라보는 제 3자의 시선에서야 비로소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 명확히 보이는 것

그러나 그 3자도 스스로의 세상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확률이 높아 안타까운 것

 

그래서 하나는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전체는 하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안정과 행복을 탐구해볼 수 있는 시작점이니까요.

 

결론:

1. 영원히 머무르지도 영원히 소유하지도 못한다.

2. 스스로 만족하는 보금자리라면 그걸로 OK

3. 온전히 존재하려는 노력으로 소유욕 내려놓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