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인 생각

사과 안 하는 3끼들의 심리는 뭘까?

덜소유구도자 2024. 5. 6. 00:23

 

안녕하세요 덜소유구도자입니다.

 

요즘 뭐 잘못하면 사과를 잘 안 하대요.

 

제가 외쿡에 있었을 때는 뭐만 하면 다들 Sorry~ 를 달고 살았는데요.

 

외국이라서 그런다고요?

 

한국은 뭐 사람사는 곳도 아니라서 기본적인 예절도 없답니까..

 

 

좀 비켜달라고 할 때 어떻게 해야하나요?

 

어깨를 톡톡치면서 " 거슬린다 오마에 " 해야하나요?

 

" 죄송한데.. (제 갈길을 막고계시네요) 길 좀 지나가겠습니다.. " 해야죠.

 

툭 밀치고 눈깔로 위아래 쳐흘기면서 지나가면 죽빵마렵습니다.

 

 

사회전반적으로 자꾸 사과를 잊어가는 갮같은 행태에 대하여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사과 안하는 3끼에게 어떻게 반응을 하고 행동해야 할지 생각해봅시다...

 

 

왜 그래야 하냐고요?

 

기본 도덕윤리가 결여된 3끼들이 너무 많은데 일일히 다 교정해주고 빡쳐할 순 없잖아요.

 

내가 그냥 좋게 좋게 넘겨야지..

 

근데 사람이 어떻게 매사에 그렇게 좋게 좋게 생각합니까..

 

적어도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관점에서의 접근이죠.

 

 

자 적을 압시다.

 

 

 

우선 사과에 대한 정의를 먼저 내립니다.

 

 

1. 사과란 무엇인가?

 

 

 

사과란 일반적으로 특정 주체가 사건에 대한 미안함을 느낀 이후,

 

그에 대한 상호간의 감정완충 및 배설작용으로 만들어가는 액션입니다.

 

 

 

2. 사과의 필요성

 

 

사과를 왜 해야하나요?

 

내가 만약에 너한테 미안한데, 내가 인간된 도리로서 미안하단 소리하나 없이 지나가버리면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불편함이 있기때문에.. 우선 말로 미안함을 표현하고 다음 액션을 취함으로 서로간에 불편한 감정을 덜어내보자.

 

라는 취지에서 진행되는 인간사에 당연히 오고가야할 기본적인 사회성입니다.

 

3살짜리 애들도 사과를 하는데 어른이 못 하면 한 마디로 사회성이 역행해버려서 사람이 덜 된 3끼가 되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사과를 하지 않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사회성이 개떨어지는 3끼라는 말 입니다.

 

근데 여기서 논점이 하나 발생합니다.

 

" 나는 사과를 받아야겠는데, 너는 미안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 라는 개별성의 원칙입니다.

 

 

 

3. 개별성의 원칙

 

 

인간은 각기 다른 환경속에서 자라납니다.

 

저는 예절이라는 범주내에서 크게 3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개인의 지능

 

- 부모의 교육

 

- 주변인물

 

개인의 지능이 높으면 부모의 교육이 없거나, 주변인물이 후레기여도 예절을 갖출 수 있습니다.

 

개인의 지능이 낮아도 부모의 교육이 높거나 주변인물이 선비면 예절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지능이 극도로 낮은 경우 부모의 교육과 주변인물이 선비여도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 혹자는 가정교육을 판타지로 배운 관계로 부모님께 기본적인 공중도덕에 대한 윤리교육이 부재된 상태로

 

이 세상에 나와 별 문제없이(사실은 문제가 있었지만 본인만 인식하지 못 함 또는 인식했는데 바뀌기 싫음)

 

살아가게 됩니다.

 

- 혹자는 기본적인 도덕윤리교육을 잘 받고, 인간 사회속에 잘 녹아서 원만하게 살아갑니다.

 

- 혹자는 기본 교육은 받지 못 하였거나 망각하였지만 인간 삶 속에 살아가면서 후천적으로 교정됩니다.

 

 

이 기본적인 도덕 수준이 결여된 경우 충분한 지탄을 받으며 사회화되고, 행동이 교정되기 때문에

 

이게 안 된 사람은 지능이 극도로 떨어지는(사회적 지능 포함)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덜 된 3끼라고 못을 박아버리는 부분입니다.

 

 

군계일학이 되지는 못 할 지언정 군학일계는 되지 말아야 사람3끼 입니다.

 

 

 

4. 사회화의 연속

 

 

인간이 나이를 먹어가며 사회화가 더욱 진행됩니다.

 

아무리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이어도 세월의 수많은 풍파속에서도 행동교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세살배기 아이보다 못 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세 살 짜리가 어른의 발을 밟고 미안하다고 하면 가정교육 잘 받은 아이이고,

 

설령 밟고나서 낄낄거리며 그냥 지나가버린다면 그 자리에서 불러다 잡아놓고 교육을 시키면 일시적이라도 교정이 됩니다.

 

낭만의 시대에는 남의 자식도 어른이계시면 즉결처분이 가능하였으나 현대에서는 그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기본 인성교육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잘못을 하고, 지탄을 받고, 교정되면 사회화가 잘 되는 것 입니다.

 

 

충분히 사리분별이 가능한 어른은 애기가 아닙니다.

 

법적으로 미성년을 벗어나고 나면 보호장치가 거의 없습니다.

 

이게 보편적인 사회의 정서이고 문화입니다.

 

 

즉, 내가 잘못하고 사과를 하지 못 하거나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함으로 인하여

 

또래나 대중에게 지탄을 받는다면 법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을 지언정 사회적으로는 큰 물의가 되는

 

사회성이 개 떨어지는 ㅄ짓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열어두는 것이 옳습니다.

 

 

" 내가 맞아 너네 다 ㅄ이야!! "

 

 

이런 놈들은 여생이 외롭고 쓸쓸할 것 입니다.

 

 

물론 당신은 부모님의 소중한 자식이고, 세상에 하나뿐인 유일무이한 객체라서 소중하다는 건 알겠지만

 

니가 내 새끼는 아니라는 점과 그래.. 열 번 봐줘도 니가 독불장군으로 ㅈ대로 하고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라는 점과

 

그딴식으로 살거면 그냥 격 떨어지는 주변인물들로만 환경을 구성하여

 

ㅄ같은 집단내에서 ㅄ같은 일이 응당 올바른 일이라 인식하고

 

니가 반대로 불합리한 일을 겪더라도 딱히 불만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인간성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기본 상도덕도 지키지 못 한다면 앞서 말했듯이

 

외롭고 쓸쓸히 사회를 혼자 살게될 것을 감안하여야 합니다.

 

 

 

5. 쓸쓸함을 각오한 3끼

 

 

 

 

정상인이 봉착하게될 최대의 난관은 여기입니다.

 

모르면 알 때 까지 알려주는 것은 사랑과 관심입니다.

 

그러나 충분한 쓸쓸함을 각오한 인간 말종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최소한의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는 사회적 괴물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얼굴을 붉히며 사과를 강요하거나..

 

법적으로 특단의 조치를 내리지 않는 이상 사회와 분리시킬 수 없고,

 

법적인 철퇴를 내리더라도 대한민국은 교화의 가능성을 늘 열어둔 국가이기 때문에

 

흉악범죄로 인한 무기징역 사형수감이어도 사회로 다시 튀어나오게 됩니다.

 

 

이런 괴물들이 사회에 나오게 되면 선량한 대중들은 별 도리가 없습니다.

 

이 인간들은 쓸쓸함, 다시말해 사회적 고립을 각오한 괴물이기 때문에 어떠한 처벌도 방법도 먹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정서적 건강과 세상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시야를 위해서

 

마음깊이 반성하고 죄를 뉘우칠 수 있는 사람에게도 사과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되도록 놓아주면 됩니다.

 

 

하나의 개인은 세상에 나와 많은 것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내가 괴물까지 품어줄 수 있는 광활한 바다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 아닌 이상

 

그 괴물을 품고자 함은 나 스스로까지 괴멸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을 좌시해선 안 되겠습니다.

 

 

고로

 

 

 

6. 결론

 

 

개인은 자신이 정해둔 규율안에서 인물을 결단해야합니다.

 

이를 맺고 끊음이 확실하다고 얘기합니다.

 

내가 단 한 번의 기회만 준다면 그것은 보편적으로 가혹할 수 있으나

 

그것이 나라는 개인이 가진 마음 그릇의 한계라면 겸허히 그것을 자신의 규율로 삼아야 지당합니다.

 

 

후천적인 발달을 통해 개인의 마음그릇을 넓혀 두 번, 세 번의 용서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두 번, 세 번 까지는 용서해도 괜찮습니다.

 

두 번, 세 번에 교화될 사람이었다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너무 섵부른 판단을 내린 것 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마음그릇을 초과하는 사람까지 보듬어야할 이유가 일반 개인에게는 없습니다.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괴물을 품어내고자 계속 마음그릇을 깎아가며 이어간다면

 

파멸하는 것은 오직 자신 뿐입니다.

 

괴물은 어차피 고립될 각오가 되어있기 때문에 당신이 파괴된 이후

 

그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괴물로 잘 살아갈 것 입니다.

 

 

괴물을 정상범주로 교화하여 사회에 나올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인격을 지닌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 라는 사람이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교화' 라는 '기대' 를 한다면

 

그 기대에 대한 '실망' 또한 온전히 내가 수거해야할 '고통' 입니다.

 

 

이 사람이 10번의 사랑과 관심에 교화될 사람인데 내가 9번의 사랑과 관심을 줄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상호 거기 까지인 관계로 좋습니다.

 

 

꾸역 꾸역 힘들게 힘들게 10번을 채울 이유가 없다면 9번까지도 개인에게는 과분한 노력이었습니다.

 

10번이 11번이 될 것이 뻔 하디 뻔 한 사람에게 나라는 존재가 교화라는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있다면 무한 용서 가능.

 

그게 안 되는 '나' 를 인지하고 있다면, 교화는 11번이 22번이 되고, 333번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뒷 주자에게 맡기거나

 

그렇게 교화를 해도 교화과 되지 않는 갮을 남기고 갈길을 가면 됩니다.

 

 

우리는 초면에 한 두 번 말해서 들을 사람과 백 번, 천 번을 말해도 못 알아들을 괴물을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반 대중은 단기간에 판단할 수 있는 지표(고정관념)로 상대방을 판단하여 곁에 둘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가령 외모의 영역인 문신, 염색, 헤어스타일 또는 고유한 언행, 태도, 사상, 패션, 목소리의 완급고저 등 입니다.

 

 

일반적인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보편적 정서 안에서 규정받을 수 있는 선택들을 하며

 

그로 인한 판단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이유로 전신에 이레즈미 문신을 발랐다면, 그로인한 문신충 소리와 정상적인 취업루트의 제한도 각오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이유로 사과를 해야할 순간에 사과를 하지 못 했다면, 사회에서 격리될 가능성도 안고 가야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본인이 스스로 정해둔 마음그릇의 한도내에서 사랑을 베풀고

 

그것을 넘어간다면 가차없이 포기할 줄 아는 여유와 같은 자기인식 및 개발입니다.

 

 

이렇게 '나' 라는 사람에 대해 파악하고 후천적인 발달로 아량을 넓혀간다면

 

나 스스로도 그렇고 더 나아가 남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더 존재하는 '나' 에게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덜 소유하고 더 존재하는 것에 가까워진 사람은 더 행복한(더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괴물을 품기위해 스스로를 파괴하지 마시길 바라며 글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