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덜소유구도자입니다.
우리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 저 섀끠 도대체 왜 저러지? '
싶은 인간들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 인간들은 정신병이 아닌 이상 따뜻한 인정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베풀면 됩니다.
그런데 인정을 베푸는게 오히려 나에게도 큰 이득이 됩니다.
이상하죠?
그리고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훨씬 잘 살고 있음에도 우울하고 불안해보입니다.
이상하죠?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백 번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전달드릴 내용은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내용이 녹아있어서 조금 어렵지만
최대한 쉽게 얘기해드리겠습니다.
해당 글에서는 여러 서구 철학자들의 견해와 저의 견해가 일치되는 부분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 인정이 필요한 사람에게 인정을 해주는 것의 중요성
인정욕구는 제가 최근에 많이 다루었던 내용입니다.
결론은 인정욕구와 인간은 땔래야 땔 수 없는 지경의 투쟁관계입니다.
인정? 어 인정.
고로 나라는 사람은 결국 인정을 받고자 하고,
타인도 인정을 받고자 합니다.
서로 받고자 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고, 인정을 능동적으로 하면 나에게 매우 유효타가 들어옵니다.
인정받는 것과 인정하는 것의 상호작용에 대한 견해입니다.
결국 우리는 인정을 받았을 때 충만해집니다.
인정은 태어나면서 부터 갈구할 수 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어쩌면 원초적인 본능에 가깝습니다.
인정은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단지 능동적인 조절만 가능합니다.
자주 예를 드는게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신다.' 입니다.
굳이 신경써서 2L , 5L 라는 목표를 정해두고 강박적인 루틴을 부여하면 불편하죠.
그저 사막에 몇 시간 세워두면 간절한 생수와 지나가다 정수기에서 마시는 생수는
우리가 정신, 육체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절대 같은 무게가 될 수 없죠.
물을 인정으로 치환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인정이 절실한 사람이 있고, 정수기에서 쉽게 따라마실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정 그릇의 총량은 개인마다 이미 정해져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결국 마실만큼 마시면 굳이 갈증이 나지 않습니다.
목이 많이 타면 많이 마시게 되지만 일정량 이상 마셔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정수기에서 쉽게 물을 따라 마실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자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머나먼 미래에 닿게될 행복의 영역이라고 여깁니다.
쾌락의 추구와는 엄격히 다릅니다.
물은 필수적입니다.
쾌락은 그렇지 않죠.
인정도 그렇지 않아보이지만 우리는 결국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곳에 닿으려면
꼭 인정에 대한 영역에 해박해야 합니다.
나 혼자만 필요이상으로 물을 진탕마시고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사람을 보는게 일반적으로 유쾌하지 않습니다.
사람 섀끠라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남을 인정하면 결국 남도 나를 인정하는 졸라리게 좋은 관계만 남습니다.
나 혼자만 잘 돼서는 결국 행복해지긴 대단히 어렵습니다.
설령 나 혼자만 잘 되고자 하더라도 타인과의 관계가 없으면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기적으로 인정을 기브앤테이크 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인정해야 나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연결됩니다.
연결되어야 행복합니다.
다만,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면 해당이 없습니다.
인정은 물과 같습니다.
마실 만큼 마시면 갈증나서 뒤질 것 같은 사람에게도 나눠줘야만 합니다.
고로 나는 마실 만큼 마신 상태와 환경을 유지할수록 더 많은 행복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내가 물이 절실히 필요할 때,
내가 나눠준 물을 마실만큼 마신 사람들 중 몇 명이 나눠줍니다.
2. 사회적 인격과 진짜 나 사이의 갈등
사회적 인격은 아동기 4살, 5살 무렵 타인과 나를 비교할 수 있게되고,
그리고 그로 인해서 나를 정의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사춘기를 거치며 이러한 나는 어떤 사람인지 확고해지고,
진정한 성인이 되어가며 점점 단단해집니다.
그런데 내가 나에 대해 규정하고 사회적 인격을 분리해나가면서 우리는 점점
외롭고 공허하고 불안해집니다.
이상합니다.
나의 처지는 더욱 좋아졌고, 언제든지 장난감을 살 수 있는데
어렸을 때 보다 더 불행해진 것 입니다.
이게 바로 소유로는 절대 채울 수 없는 치명적인 부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힌트를 드렸지만 진짜 나를 잃어버릴 때 생기는 공허함과 외로움입니다.
우리는 인정을 받고자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 인격이 받는 인정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젠가 부자가 되어 돈이 많으면 괜찮아질거라고 여기지만,
부자가 되지 않은 나는 여전히 실제 세계에 이렇게 존재합니다.
우리는 성취하고, 어떤 상태가 되고, 어떤 환경을 이루고자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럴수록 점점 불행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원인을 다른 곳에 찾는데 결국 불행을 느끼는 것도 나 자신이고,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나 자신입니다.
원인은 나 밖에 없습니다.
나의 심리상태가 불행을 느끼는 것 입니다.
나는 왜 불안하고, 우울하고, 공허합니까?
3. 나라는 사람은 단 한 명
상기 짤방은 뭔가 되고자 하는 사회적 인격이 분리된 실제 세계의 나입니다.
왜 저러고 있을까요?
C-Bar 매칭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라는 사람의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자 하는데 나는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아니걸랑요?
나는 못난 모습도 졸라리게 많고, 허접한 모습, 찌질한 모습, 구제불능인 모습이
나잇값 못하도록 만드는 영 정 떨어지는 모습인데
그러고 있을 수가 없잖아요.
왜요?
그러면 아무도 안 놀아주고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하거든요.
물을 나누고자 해도 나눌 사람이 없고,
물이 절실히 필요할 때 받을 사람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사회적 인격이 내가 아닌가요?
뭔가 해보려고 되고자 하는 나는 내가 아닌가요?
그럼 정확히 그렇게 나눠지는 시점이 언젭니까.
외출하고자 신발을 신을 때?
나가서 처음 사람을 마주할 때?
직장에 출근해서 밀접하게 연관된 사람을 마주칠 때?
놀랍게도 나는 분열하지 않습니다.
그런 척 하는 자신도 결국엔 나 자신입니다.
그저 그런 개념들은 내 머릿속에서만 분리된 개념일 뿐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은
이게 진짜 나인지, 그런척하는 나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우리는 만인과 나를 믿지 못 하는 절대 불신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하나요?
땡!!
그러니까 불안하고 공허하고 우울한 것 입니다.
내가 인정을 받아야지, 내가 내 맘대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내가 아닌 내가 인정받으면
뭔가 채워지던가요?
결코 그럴 일이 없습니다.
받아쓰기 100점 받은 나도 나이고, 0점 받은 나도 나에요.
0점 받아서 쪽팔리고 엄마한테 혼나고 그래서 100점 받기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100점을 받으면 순간 인정을 받습니다.
근데 그게 어느새 무던해지고 공허합니다.
그걸 계속 하고 있는 거에요.
끝나지 않는 우울함과 공허함의 세계로 빠져드는 상황입니다.
그저 글월을 알기를 즐기고, 한글를 알아가며 자연스레 얻은 100점과
엄마한테 칭찬받고, 쪽팔리기 싫어서 얻은 100점은
같은 100점이지만,
전자는 행복하고, 후자는 불행합니다.
우리는 명확히 그 차이를 이제는 인지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4. 나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
우리는 어떨 때 가장 편안하고 즐겁나요?
사회적 인격과 진정한 나라고 생각하는 사이의 격차가 적은 사람은 타인과 있기를 즐길 수도 있고,
그 간극이 큰 사람들은 오히려 조용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간극이 큰 만큼 타인과 있기를 즐길 수도 있고,
그 간극이 적어서 오히려 조용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이래나 저래나 결국엔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사회적 인격을 위해 연기하는 모습도 결코 내 안에 없는 모습까지는 오래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고양이가 언제까지나 발톱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연기하는게 에너지 소모가 커서 결국 간극을 줄이고자 노력합니다.
그런 노력들 사이에서 노출된 모습들 마저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내가 내 맘대로 오래갈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신뢰를 줍니다.
그런데 그 신뢰에 배신을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던가요?
아니죠.
타인이 내 옆에 남거나 말거나 남을 놈은 남고 떠날 놈은 떠나겠지
라는 상태가 앞서 말씀드린 물이 충분한 사람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진 않습니다.
그냥 내 머릿속에서 정의내린 나라는 것을 없애버리면 끝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고 알아보고 나와 수없이 얘기하고 나를 알아가라고 말씀드렸는데
결국 그렇게 알아보고나면 어떤가요?
스포긴 하지만 나는 그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는 사람이 남습니다.
1. 나는 때때로 외향적이다.
2. 나는 때때로 내향적이다.
둘 다 예스죠?
당연합니다.
MBTI가 유행하는 이유는 우리가 무언가 규정하고 쉽게 인정할지 말지를 원하니까
그런 쉬운 지표들로 자신과 타인을 정의하고 빠르게 판단하기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혼자 있을 때 외향적일 수도 있고, 밖에 있을 때 내향적일 수도 있습니다.
둘 다 내 안에 있는 모습이지 결코 내가 분열된 것이 아닙니다.
부자가 되고자 성실해진 나와 거지가 되려고 게을러진 나는 분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실한 나도 있고, 게으른 나도 있습니다.
그저 동시간대에 실제 세계에 엄연히 멀쩡하게 존재하는 단 하나의 자기 자신입니다.
그걸 분간하는 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이게 핵심키워드 입니다.
그걸 분간하는 것은 내 머릿속에서만 벌어지는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병1신같은 모습, 멀쩡한 모습, 멋진 모습
전부 다 내 안에 존재하는 진짜 나의 모습입니다.
쓰레기도 아니고 분리하지마세요.
5. 결론: 진정한 나로서 살아가는 것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 동안 꺼내보이기 싫었던 진짜 나와 가짜라고 인지하던 나와 화해할 시간입니다.
그런 모습도 나이고, 저런 모습도 나입니다.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아닙니다.
관측하면 상태가 바뀌지 않습니다.
사회 속에서의 나와 진짜 나를 조화롭게 통합하는 것이 중요한 미덕일 뿐입니다.
가면이나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모습도 있는 나를 꺼내서 보여주는 것 입니다.
그리고 편안한 모습도 꺼내서 보여줄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자기 존중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인정할 줄 알아야, 타인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인정할 줄 알아야, 자기 자신도 인정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 분열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관계를 통해 계속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가짜 나와 진짜 나 뿐만 아니라, 진짜 나와 진짜 나,
그리고 진짜 나와 가짜 너, 진짜 나와 진짜 너.
분간하는 것은 나와 너의 머릿속일 뿐이지.
현시간대에 나와 너가 만났다면 그냥 우리는 그런 모습의 나와 저런 모습의 너입니다.
뭔가 다른 사람이 와서 서로 만나고 있는게 아닙니다.
그런 너도 너고, 저런 너도 너입니다.
규정하고 분간하는 것을 멈추면 뭔가 되려고 하는 것도 멈춥니다.
그저 인과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유로던 공부를 열심히 했든, 공부를 게을리 했든
될 거면 됐고, 안 될거면 안 됐습니다.
그런 것들만 남습니다.
그것은 공허하지 않습니다.
공허할 거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순간 순간에 진심을 다해 살아가는 아이들이 순간 순간에
화도 나고, 짜증도 내고, 즐겁기도 하고, 웃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가 정의내린 감정들일 뿐이지
아이들은 행복한지, 불행한지 정의내리지 않습니다.
그냥 보이기에 행복해보이고, 불행해보이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이 있는 그대로 그 순간에 존재합니다.
뭔가를 규정해서 분리하지 않습니다.
부럽지 않나요?
진정히 존재하는게.
그러한 상태가 니체가 제안한 위버멘쉬에 가까운 개념인 것 같습니다.
Who am I ?
그냥 나는 나야.
덜 소유하고 더 존재하세요.
그렇게 하려고 하지말고 그렇게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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