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인 생각

인정욕구를 해결하는 방법은?

덜소유구도자 2024. 8. 13. 21:52

안녕하세요 덜소유구도자입니다.
 
한동안 인정욕구에 꽂혀서 인정욕구에 관련된 생각들을 많이 했습니다.
 
니체에 대해서도 읽어보고 에피쿠로스에 대해서도 다시 탐구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인정욕구를 인정하면 어떨까?
 
인정욕구를 인정하면 그 다음 스텝이 생깁니다.
 
 
 
그것을 깨닳았습니다.
 
 
 

 
사람처럼 사고하지 않는 강아지입니다.
 
그러니까 배고프다 똥마렵다 하고싶다 이런 생각말고
 
인간처럼 사고할 수 없습니다.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면 강아지는 본능적인 것 다음의 스텝을 할 수 있을텐데
 
아직까지 그런 강아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처럼 사고하지 않는 강아지는 인정욕구가 없을까요?
 
강아지는 인정욕구가 있습니다.
 
쓰다듬어주세요.
 
사랑해주세요.
 
밥을주세요.
 
친구가 되어주세요.
 
인간에게 와닿을 수 있도록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알립니다.
 
 
 
 
인간이라고 꼭 사고를 할 수 있지도 않습니다.
 
 

 
 
어린 아기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엄마밥주세요.
 
똥쌌어요.
 
심심해요.
 
안아줘요.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고를 할 수는 없습니다.
 
 
 
 
즉,
 
 
말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유무와 사고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유무는
 
인정욕구에 근본적인 변수로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부분입니다.
 
인정욕구는 생각이 골똘한가 아닌가의 여부 이전부터 발현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인정욕구는 생각하거나 인지하는 것 이전에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고 인지하는 것으로는 인정욕구를 없앨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본능의 영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아기도 본능이 있고, 강아지도 본능이 있습니다.
 
잠을 자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고, 관심을 받고 싶고, 배변을 하고 싶은 시기부터
 
인정욕구는 이미 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강아지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정욕구는 태어나자마자 발현됩니다.
 
나는 손발을 쓸 수 없으니 우는 것만 할 수 있다.
 
낑낑거리면서 젖을 찾겠다.
 
정도의 표현만 할 수 있을 때 부터 인정욕구가 발현되기 때문에
 
인정욕구를 과연 이성적으로 없애거나 억누를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고도화된 수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그 영역 에 계신분들은 우리가 성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인으로 착각했던 사람들도 본능적인 영역은 어쩔 수 없습니다.
 
배가고파할 수 있으나 배가고픔을 느끼지 않을정도로 사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배가고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프지 않다고 속이는 수련입니다.
 
어떠한 영양분의 섭취도 필요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렀다면 굶어죽는 것 마저 없어야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아주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본능이 있는 것은 사고를 하면서 부터 그렇지 않은 척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배가고프지만 배가고프지 않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야스가 하고 싶지만 하고 싶지 않은 척 여유로운 척 할 수 있습니다.
 
잠이 오고 눈이 감기지만 졸리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남을 속이기 위한 말이나 표현이지
 
나는 나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나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배가 고프면 배가 고프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합니다.
 
인정을 받고 싶으면 받고 싶다고 말해야 합니다.
 
야스가 하고 싶다면 야스를 하고 싶다고 말해야 합니다.
 
적어도 나한테는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 에게는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자기자신 마저 속일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병리학적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것은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상을 하며 고도로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능적인 것을 무감각하게 하여 뛰어넘은 사람 이 되기 위함이지
 
자기 자신을 속이려는 목적은 아닐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포기하면 편합니다.
 
인정욕구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봅시다.
 
본능적인 단계와 밀접한 인정욕구를 해결하려는 것 자체가 욕심일 수 있습니다.
 
소유가 그러하듯
 
인정욕구도 그렇게 취급해버린다고 가정하는 것 입니다.
 
아마 진리일 수도 있습니다.
 
 
소유욕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단지 1000원으로 만족하는 사람도 있고,
 
1000억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고와 환경으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떡볶이를 1인분을 먹고 배부른 사람도 있고,
 
10인분을 푸드파이트해도 배부르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떡볶이를 5개만 먹어도 배가 부른 소식좌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고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질의 영역입니다.
 
다만,
 
체질적인 멸치는 돼지가 될 수 있고,
 
체질적인 돼지는 멸치도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능한 영역입니다.
 
 
아주 작은 생식기 밑으로 아기도 나올 수 있습니다.
 
배를 갈라 꺼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것을 지향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부자연스러운 것에는 자연스러운 것에 비해
 
부작용(Side-effect)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인정욕구는 자연스럽습니다.
 
인정욕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인정욕구는 없앨 수 없는 것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어떤 사람은 많은 인정욕구를 지니고 있고,
 
어떤 사람은 적은 인정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균의 인정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많고 적고를 정의하려면 평균을 정의해야만 합니다.
 
인정욕구가 많다고 비정상적이거나 아주 적다고 비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병리적인 증상으로 구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저 사람의 생김새와 같습니다.
 
인정욕구의 정도차이로 사회적인 영역을 제외하면 자기자신의 영역일 뿐입니다.
 
그저 자기자신에게 나의 인정욕구를 소개해주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게 하면 됩니다.
 
나는 살면서 본 대한민국 사람들에 비해 인정욕구가 적은가 많은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지표가 아닌 관계로 대한민국 사회 밖에 나가면 무의미한 지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자기자신이 자기자신에게 소개하는 주관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그럼 많고 적고 평균이고의 비교를 하지 않고
 
나는 어느 정도의 인정욕구가 있는지만 생각해보면
 
오히려 크게 이상하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에 나밖에 없고,
 
나라는 사람이 이 정도의 인정을 받고 싶다.
 
라고 한다면
 
뭐가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타인이 없다면 인정욕구도 발현될 수 없습니다.

관련된 글을 적었던 적이 있는데
 
인정욕구가 있다고 인지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정욕구에 대해 골똘한 것은 세상에 나 자신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80억의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뭘 해야하는지 뭘 하고싶은지를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계속된 심문을 통해서 내 인정욕구가 어떤 쪽에서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조절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면
 
조절하면 됩니다.
 
그것은 사고의 영역으로 가능합니다.
 
아주 아주 가능합니다.
 
 
 
 

 
 
 
나는 쌀밥 210g과 닭가슴살 200g 을 4시간 간격으로 섭취하면 배가 부르다.
 
라는 것은 스스로가 느끼면서 알 수 있습니다.
 
어? 아닌데? 나는 쌀밥 420g과 닭가슴살 400g을 2시간 간격으로 섭취하면 배가부른데?
 
그러면 당신은 그런 사람입니다.
 
만약 내가 쌀밥 420g과 닭가슴살 400g을 2시간 간격으로 섭취하는 사람인데
 
어떤 목적이나 환경에 의해 쌀밥 210g과 닭가슴살 200g을 4시간 간격으로 섭취해야 한다면
 
그에 맞게 생리적으로 사고적으로 수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야 인고의 시간을 통해 체중감량을 하고 필요섭취량이 줄어들면 그렇게 되겠죠.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도 건강적신호가 떠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사고를 통해 [조절]을 할 수 있습니다.
 
 
 
 
식욕은 본능적인 영역이지만 우리는 신체조성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식욕을 80억의 평균정도의 수준 또는 과학적으로 건강한 수치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고와 환경조절을 통해 맛대가리 없는 음식을 맛있게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그냥 별 생각도 없고, 산해진미를 갖다놔도 맛이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을 데려와서
 
10끼 정도 굶기고나서 쌀밥을 210g 줬다고 가정해봅시다.
 
맛이 없을까요? 쌀밥만 줘도 조온나아게 맛있게 먹을 것 입니다.
 
물을 안마시는 사람에게 3일 정도 수분섭취를 제한시키고 물을 무제한으로 먹게 해준다면
 
과연 그 양반이 물을 안 마시고 버틸까요? 아니면 미친놈같이 마실까요?
 
본능은 그렇게 조절할 수 있습니다.
 
 
 
사고를 왜 자꾸 중요하게 여러 번 반복해서 얘기하냐면
 
많은 일반적인 사람들은 절제된 삶을 살아야 뼈저리게 감사할 줄 압니다.
 
내가 생존게임을 하는데 절대 죽지않는다면 컨텐츠를 모두 즐기면서도 계속 즐거울까요?
 
생존게임을 하는 사람이 치열하게 버티며 간신히 살아남았다면
 
그 과정에서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함께하지만 아마 돌이켜보면 존나 재밌을 것 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존게임 자체에서 오는 그 아슬아슬함이 즐거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존게임 자체가 버거워서 그만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인정욕구는 그렇게 조절하는 것이라는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제가 이걸 어떻게 느꼈냐면
 
이기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자꾸 돈도 주고, 마실 것도 나눠주는 것 입니다.
 
나는 이 사람을 위해서 뭘 하는게 아니고
 
그냥 내가 돈벌려고 하는거고
 
이왕이면 즐겁게 일하면서 돈을벌고 싶어서 하고싶은 일을 하는데
 
사람들이 자꾸 팁도 찔러주고, 음료수도 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사랑과 관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무미건조하게 감사하다고 기계적으로 얘기할 수 있지만
 
정말 목마르고 힘드니까 평소에 먹던 제로 음료수가 아닌 기타과당이 가득한 음료수여도
 
기꺼이 받아서 감사하게 마시게 되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애정과 관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근데 내가 마실물도 많고, 음료수도 잔뜩 가지고 있으면 그렇게 감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걸 뭐 굳이 애정과 관심이라기 보다는 안 필요한 걸 구태여 주시는구나 생각할 수도 있을 것 입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음료수를 받기 위해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만을 위해서 일을 했는데
 
관심과 애정을 받을 수 있는 행위가 있고,
 
타인이 마치 자기자신을 위해서 한 행동이라고 착각할지언정
 
나의 행위자체에 감사함을 느껴준다면
 
많은 사람이 그렇게 된다면
 
굳이 내가 사랑을 갈구하거나 인정을 바랄 필요가 있을까요?
 
이미 음료수 한 캔에 그게 다 전달되었는데?
 
그렇게 접근해보고나니 인정욕구에 골똘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인생의 1순위가 나의 행복이라서 그저 나의 행복을 위해서만 했던 일에
 
타인이 감동하고 감사함을 느끼는 부작용(Side-effect)이 발생하는 일이라면
 
굳이 안 할 이유가 있나요?
 
없죠.
 
그럼 그거 계속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내가 인정을 바라지도 않는데 계속 인정을 해주니까요.
 
내가 바라는 인정보다도 더 넘치게 인정을 하는데
 
내가 바라는 사랑보다도 더 넘치게 사랑을 주는데

굳이 왜 그것을 갈구해야할까요?

이미 충족이 되었으니 더 들어오는 것은 감동적이지 않을 지경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받아서 넘쳐흐르면 오히려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더 나눠줄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한 상태이죠.
 
인정욕구와 소유욕구 모두 그렇게 조절하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덜소유하고 더존재하라고 전달하는 핵심에
 
계속 자기자신을 1순위로 놓고 자기자신만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해보자고 한 것은
 
이런 것들을 모두 조화롭게 조절하고 채우기 위함입니다.

나는 이미 그릇이 넘치게 사랑을 받고 있으니 더 필요한 사람에게도 자연스레 나눠줄 수 있는 것 입니다.
 
내겐 이미 많은 음료수가 있어서 썩혀 버리느니 목이 마른 사람에게 받았던 음료수를 흔쾌히 나눠줄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럼 목이말랐던 사람은 나에게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이러한 순환이 곧 웰빙(잘사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