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인 생각

타인은 지옥일까? 친구는 꼭 필요할까?

덜소유구도자 2023. 10. 6. 00:55

안녕하세요 덜소유구도자입니다.

 

글이 좀 뜸했네요.

 

글이 좀 뜸하다 싶으면 별 일이 어메이징하게 생겼거나

 

너무 별탈없이 지내고 있다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지금은 후자 입니다.

 

 

별안간 일과를 끝내고 소파에 누워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생각이 정리가 안되길래

 

저의 해우소인 이곳에다가 생각을 쭉 늘어놓고 해결해가는 방식으로 투고를 하고자 합니다.

 

이 방식은 여러분들에게도 굉장히 추천드리는 루틴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확고한 신념과 다른 이견은 쉽게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기 어렵지만

 

긴가민가한 이슈들, 답이없는 고민들을 타인에게 찾고자 해봐야 결국 자기 자신에게 답이있습니다.

 

왜?

 

어차피 남들한테 50대 50인 고민에 대해 양자택일을 해야하는데

 

나에게 확신을 달라고 해봐요.

 

 

영식이냐 영호냐 양자택일의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 사람 저 사람.. 심지어 영호와 영식에게 양쪽에게 물어봐도 결과가 나오던가요?

 

누구 한명이 확답을 주더라도 결정은 결국엔 누가 하나요?

 

내가 합니다.

 

그래서 긴가민가한 이슈, 도덕윤리적인 문제, 답이없는 이슈, 이거냐 저거냐 고민이 깊어질수록

 

나에게 물어봐야 답이 나옵니다.

 

 

내가 열심히 상대방 말을 들어주고 조언해줘봤자 상대방이 결국에는 자기맘대로 선택하거든요.

 

그래서 그 뒤에다 대고 " 저봐라 내가 저럴줄 알았다. " 라고 무당빤쓰훔쳐입은 발언을 해봤자

 

별 의미가 없습니다.

 

 

 

타인은 지옥일까?

 

친구는 꼭 필요할까?

 

라는 고민은 인생가치관차이로 명확히 나뉘는 문제이기 때문에 나에게 자문자답을 해보겠습니다.

 

 

타인은 나를 제외한 모든 인간의 범주입니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타인이고,

 

친구라는 것은 걔중에 내가 옆에두고 지내는 사람들이죠.

 

 

타인과 친구의 차이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선택의 유무입니다.

 

내가 선택해서 옆에두면 내 친구내지 지인이 되는 것이고,

 

내가 너랑은 아무 연관지어지고 싶지 않다거나 아직 너를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과 나는 넓은 의미의 타인인 남남 관계가 되는 것 입니다.

 

 

또 지인이나 팔로워같이 친구도 아니고 남도 아닌 관계들도 있는데

 

애초부터 그런 존재들은 저의 고민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존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골싸메면서 파고들어야하는 개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타인이 지옥이라고 얘기하려면

 

우선 그 범주를 친구나 애인, 가족 등이 아닌 지인 또는 남남인 대상이라고 의미를 정의해야합니다.

 

편의상 이하 남남이라고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지옥인가? 라고 생각해봤을 때,

 

결론은 내 마음에 들면 엔젤이고, 내 마음에 뭣같으면 뭣이 되는거겠죠.

 

따라서 타인(남)을 지옥이라고 규정해버리는 순간 나를 제외한 모든 잠재적 데빌들 사이에 살아야하는 것인데

 

그런 삶은 이상적인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개인 스스로에게는 참으로 비참한 세상이 될 것 입니다.

 

그래서 저는 타인은 지옥이다 라는 논제에서는 아니오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타인은 나에게 친밀하게 규정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불특정 다수라고 규정하겠습니다.

 

내 맘에들면 엔젤, 내 맘에 안들면 데빌.

 

즉 이 세상에서 나를 제외한 인간들은 악마이거나 천사이거나 네팔렘인 그런 존재들인 것 입니다.

 

그것을 현실세계의 인간관계라고 정의합니다.

 

 

 

그 이후에 더 좁은 의미의 친구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친구라는 것은 내가 선택해서 곁에 둔 사람들입니다.

 

지인은 친구의 범주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알고지내는 사람이며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거나 내 마음에 알맞지 않은면이 있어서

 

더 이상 친해지고 싶지 않다고 규정해둔 사람들인데 살다보니 내 가치관이나 상대방의 변화에 따라 더 돈독해지기도 합니다.

 

허나 현재 지금 이 순간에나 규정되어있는 것이지 앞으로의 관계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마치 도처에 널린 계란들을 수거하기위한 바구니를 왼손 오른손에 들고

 

왼손에 든 바구니에는 아주아주 깨끗한 계란만 담고

 

오른손에 든 바구니에는 이물질이 조금 묻은 계란도 담는 것 입니다.

 

그리고 왼손에 든 바구니는 친구라고 정의하고,

 

오른손에 든 바구니는 지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그 둘은 날씨나 환경 등 여러 변수에 의해 더러워질 수도 있고, 내가 닦아줘서 깨끗해질 수도 있고,

 

그런 여러가지 변수에 의해서 왼쪽 오른쪽 취사선택되어 옮겨담아지거나 또는 다시 야지에 버려둘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던 중 문득 그런생각을 하는 것이죠.

 

 

 

가만있어보자... 이 계란이라는 것이 나에게 진짜 필요한가??

 

 

 

 

이 계란이라는 것을 별생각없이 주워담고 골라가며 살다보니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되는 경험도 하는 것 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계란을 고를까

 

내가 계란을 고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과연 내가 골라담을 수 있는 계란이었던 것인가

 

계란을 담고자 하는 과정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다

 

라는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고는 잠시 먼 발치에서 제 3자의 눈으로 한 번 쳐다보는거죠.

 

 

그리고 저는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했습니다.

 

나 라는 사람은

 

많은 계란을 선별해서 들고다닐 수는 없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그 계란들을 내맘대로 내손에 쥐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구나

 

라는 부분입니다.

 

 

그 이후로는 내가 그 계란들을 갖고자 하는 마음조차 내려놓게 되는 것 입니다.

 

그로 나온 말이 이제 "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 와 같은 격언이겠지요.

 

그렇게 되어서는 제법 초연해지지만 어딘가 아쉽기 마련입니다.

 

 

왜?

 

나는 절대 다수에게 사랑받고 싶다 라는 인간성(본능; 인정욕구)가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야 친구라는게 참 부질없더라.. 하고 다 떠나보내고 나서는

 

어라? 제법 쓸쓸한걸?

 

싶다는 얘기입니다.

 

 

뭐 지금 제법 쓸쓸하지는 않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또는 주목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떠올리자면

 

또 그렇거든요.

 

 

나를 무지성으로 많이 사랑해주는 99%의 대중이 있어도

 

나를 싫어하는 1%의 대중의 말이 더 쎄게 박히거든요.

 

애시당초에 99:1의 비중으로 균형적인 세상이었다면 1처맞고 99에게 사랑받으면 치유가 되겠지만

 

인간사에 50:50의 비율로 좋아해주는 놈, 싫어해주는 놈을 섞어 살아도 제법 잘사는 인생이걸랑요.

 

 

우리가 이걸 아니까 그렇게 가족에 목을 메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목을 메지 않나 싶습니다.

 

누군가는 이혼을 하고,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누군가는 사랑하고, 누군가는 독방에서 좐슨이나 주물르면서

 

그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사랑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관계에 선택과 집중을 하게됩니다.

 

 

내 인프라가 좁으면 좁은 곳에서 내 인프라가 넓으면 넓은 곳에서

 

내 마음 온전히 주고, 더 받고 충만하거나 덜 받고 조금 더 갈구하거나

 

아니면 아예 받지못해서 실망하고 슬퍼하거나

 

 

혹자는 그렇게 사람을 대하기도 합니다.

 

나는 마음을 많이 써도 반만 주겠다.

 

그래야 나중에 아깝지가 않다라는 이야기도 하죠.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죠.

 

그럼 나에게 묻는 겁니다.

 

 

나는 어때?

 

저라는 사람은 선택과 집중입니다.

 

그리고 사랑하죠.

 

내 마음의 일정부분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최대한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배려심이라는 건 애초에 존1나 결여된 사람이기 때문에 배려는 잘 안 합니다.

 

배려라는 것도 사실 나에게 배려이지 남에게는 배려가 아닌 부담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배려를 거의 안 합니다.

 

대신 배려를 하기전에 묻습니다.

 

" 문을 잡아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

 

라는 식으로 말이죠.

 

실제로 문을 열고 잡아주는 매너는 뉴질랜드 살 때부터 몸에 인이 박혀있어서 질문을 하진 않습니다.

 

다만 잡아주는데 안기어나오면 그냥 스윙해서 문짝에 처박던가 말던가 두고 갈길갑니다.

 

 

저는 애초에 그런 스타일이 맞기 때문에 친구라는 관계도 그렇게 규정하는게 편합니다.

 

줄 때는 잃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을 줍니다.

 

하지만 또 인간이 계산적이지는 못해서 일단 줘놓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허나 애초에 나한테서 뭔가 선의가 나갔다는 것은 이미 내손을 떠난 것이고,

 

돌려받으려고 하는 것은 큰 욕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은 달라고 한 적도 없거든요.

 

애초에 달라고 해놓고 줬더니 "ㄳ" 한마디 없이 처 토껴버리는 새ㄲ..사람은 친구라는 범위안에 넣어두지도 않습니다.

 

그런 여러가지 나만의 필터로 걸러서 걸러서 들어온 인간들이 지금 내가 정말아끼는 10명 남짓의 사람들인데

 

카톡 열어서 그 10명남짓한 사람들과 일가친족들 제끼고 난 나머지 타인들은 다 밀어버려도 아깝지 않다는 말입니다.

 

 

득실을 따져 묻고 지인과 친구를 사귀는 것은 저와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인간관계를 유지하기위해 에너지를 많이 쓰고 싶지 않고,

 

불명의 stranger를 만나면 그 사람을 파악하기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쓰기에 타인과의 접점을 잘 안 만듭니다.

 

그렇게 10명남짓의 친구를 만나면 뭔가를 재거나 더 이상 파악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아마 내가 생각하거나 들여다보지 못했던 의외인 부분은 발견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을 파악하기위해 오만오감을 집중해서 파악할 필요가 없기때문에 언제 만나도 편안하고 즐겁죠.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가 없는 것도 아주 큰 장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힘들 때, 기쁠 때, 슬플 때, 우울할 때, 심심할 때 등

 

감정의 빈자리를 채우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죠.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혼자이거나

 

너무 기쁜 순간이 있는데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굉장히 쓸쓸할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에는 불특정 다수에게 사랑받기 위해, 그들의 관심을 사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十인싸로 살아가기도 해봤지만 저는 당시에 학교를 다니거나 밖에 돌아다니는 것이

 

제법 곤욕이었습니다.

 

원치 않는 사람들과 친한척해야하고, 원치않는 시간들을 반강제로 보내야했거든요.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은 즐거운 추억 보다는 씁쓸한 후회가 아주 큽니다.

 

 

방방곡곡 시시각각으로 나의 필요에 의해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편리한 삶이겠지만

 

아마 100명의 붕우가 있어도 다스리지 못하는 많은 어려움들도 클 것 입니다.

 

그래 불특정 다수에게 사랑받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라면

 

적어도 내가 선별할 수 있을 만큼 선별한 사람들과 더 사랑을 나누고,

 

그리고 그 많은 사랑들을 끌어안고 미래에 찾아올 다른 붕우들을 기약하며

 

사랑을 나누고 다니는 것이 옳다고 판단됩니다.

 

친구는 꼭 필요할까? 라는 논제에서 저는 그렇다 입니다.

 

그러나 나의 용량이상으로 TO를 남용하는 것은 상대와 나에게 모두 좋은 영향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저의 마음에는 현재 여분의 TO가 10명정도는 더 가능할 것 같네요.

 

지금부터 열린 마음으로 남은 TO를 조금씩 만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생각이 정리가 다 되었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도 손톱만한 뭔가라도 느끼셨길 바랍니다.

 

덜 소유하고 더 존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