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주관적인 생각

소유욕과 인정욕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방법

덜소유구도자 2023. 6. 17. 03:23

안녕하세요 덜소유구도자 입니다.

 

이번 글은 제가 저 스스로에게 해주는 말입니다.

 

돈을 쫓아가다가 길을 잃은 나 자신에게 진정성 있게 얘기하는 것.

 

근데 항상 그렇죠.

 

드라마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자서전도 그렇고

 

내가 아닌 남의 일인데도 깊은 울림과 공감을 느낀다는 건

 

우리가 같은 시간속을 살아가고 비슷한 감정선을 공유할 수 있다는 의미겠죠.

 

자기자신 앞에 서서 홀딱벗고 나를 대면했을 때 하는 말이 가진 무게를 우린 느낄 수 있습니다.

 

 

 

이왕 솔직해져 버린거 오늘은 아주아주 철학적인 기본 개념부터 출발해서 장엄한 마무리를 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낙관적 허무주의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낙관적 허무주의의 반대말은 비관적 허무주의 입니다.

 

비관적 허무주의란 무엇일까요?

 

세상에 어떤 의미도 목적도 없다고 믿는 철학적 견해입니다.

 

인생은 고통과 연속이며,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 입니다.

 

삶의 모든 노력은 무의미하고 헛되다고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비관적 허무주의로 살고싶나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네요.

 

우리는 세상에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습니다.

 

그러한 삶을 대하는 태도를 죽은 송어눈깔마냥 흐리멍텅하게 살아가고 싶진 않은 것 입니다.

 

비관적 허무주의라고 사는 사람이 종종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그런 사람들을 음침하다고 생각하고 멀리하려고 합니다.

 

부정적 에너지가 가득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낙관적 허무주의는 비관적 허무주의의 반대개념입니다.

 

세상에 어떤 의미도 목적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즐기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철학적 견해입니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삶의 모든 노력은 무의미하고 헛되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허무주의의 반대말은 뭘까요? 낙관주의 입니다.

 

그런데 낙관적 허무주의라니..

 

똥을 싸는 동시에 밥을 먹는 소리같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것이 삶이네요.

 

정리하겠습니다.

 

 

낙관주의 : 밥을 먹는다

 

허무주의 : 똥을 싼다

 

낙관적 허무주의 : 밥을 먹으며 똥을 싼다

 

비관적 허무주의 : 먹지 않고 똥을 싼다.

 

 

제가 앞으로 설명할 내용에 이 개념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서 이 시대에 살고있습니다.

 

그런데 내일 어떤 절망적인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멀쩡하게 잘 살던 사람이 심정지로 급사할 수도 있고,

 

나는 안전운전하고 있는데 덤프차가 달려와서 꼴아박아가지고 그길로 황천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 삶과 죽음의 경계의 순간에 그 동안 차근히 쌓아올렸던 삶의 노력들이 죽음을 막아주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죽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저 상위 개념이 나타나는 것 입니다.

 

어차피 두질거 뭣허러 열심히사냐 (비관적 허무주의)

 

어차피 두질거 살아있는 순간엔 행복해보자 (낙관적 허무주의)

 

저는 낙관적 허무주의를 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봤기 때문에 겸허할 수 있고,

 

내가 스스로 행복하게 살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능동적일 수 있는 것 입니다.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느낄 수 있지만 이런 생각을 한 번 도 해보지 않은채 살아가는 사람도 굉장히 많습니다.

 

내가 내 세상을 받아들이고 눈을 뜨고 내 의지로 내 세상을 영위할 수 없는 것 입니다.

 

삶의 태도를 결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은 죽은채로 타인의 의지로 살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 타이밍에서 사르트르와 헤겔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최대한 가볍게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고있습니다. 나는 자신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니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타인이라는 존재도 있는 것이 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타인을 인식하게 되어버리고나니 타인이 꼭 내맘에 들지는 않는 것 입니다.

 

타인이 내 방에 똥을 싸고 도망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도 남의 구역에 똥을 싸고 도망간 적이 었었는지 되돌아봅니다.

 

그래, 나는 타인이 내 구역에 침범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구나 라고 인식합니다.

 

그리고 나는 타인의 구역에 침범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게 됩니다.

 

 

지금 볼드 처리해놓은 부분이 자기의식 입니다.

 

 

방금 자기 의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내가 있었고, 타인을 인식하고, 타인을 통해 나를 인식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바로 타인이라는 존재가 등장했지만 타인의 인식은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 입니다.

 

1. 나의 인식

 

2. 나의 시선에서 타인을 바라보는 인식

 

3. 그리고 타인을 바라보는 나의 인식을 통해 바라본 나의 인식 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을 인식할 때 타인을 통해서 인식하게 됩니다.

 

 

" 아닌데요!! 타인이 나에 대한 이미지를 이야기 해줄 때도 있는데요!! "

 

그게 3번이잖아요.

 

 

" 아닌데요!! 좀 다른데요!! 3번의 화살표는 자신에서 출발했지만

타인이 나를 이야기할 땐 타인에서 출발한 화살표인데요?!! "

 

그러니까 그게 3번이잖아요. 다시 생각해보세요.

 

 

자, 백색의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나라는 사람만 덩그러니 놓여있습니다.

 

그게 1번 입니다.

 

나는 1번 인채로 존재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이 세상에 또다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게 2번 입니다.

 

그 사람은 나랑 똑같이 생겼습니다.

 

이게 3번 입니다.

 

그 사람은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키가 좀 더 큽니다.

 

역시 3번 입니다.

 

이게 인식입니다.

 

(여러분은 방금 사르트르의 즉자-대자-즉자대자 에 대해 배웠습니다.)

 

 

타인이 나에게 이야기 합니다.

 

" 야!! 너는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나보다 키가 작다. 열등한 놈. "

 

나는 그 순간 결정됩니다.

 

열등한 존재로 말입니다.

 

나는 그래서 그에게 열등하지 않다는 걸 인정받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타인에게 말합니다.

 

나는 너보다 키가 작지만 더 큰 꿈이있어!!

 

그러자 타인이 대답합니다.

 

" 그런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넌 나보다 작으니까 세상을 더 낮은 시선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잖아. "

 

나는 내가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집니다.

 

(여러분은 방금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자기인식에 대해 배웠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최대한 많은 다수에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비난을 하게 됩니다.

 

3번 자기인식에 의해서 타인을 나보다 깎아 내림으로서 내가 우월한 존재로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뭐 그렇게 하면 조금 기분이 좋아지겠죠.

 

근데 내가 깎아 내린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인식되는 존재들이 세상에 무수히 많은 겁니다.

 

그럼 나라는 존재는 더 불안해지고, 더 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자 갈망하게 됩니다.

 

마치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거 맹키로 인정에 인정에 인정을 더해보아도 결코 독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나는 독을 채우기 위해 이 세상 모두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비난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하고 싶어하는 가장 열등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비난을 하면 안되는 이유 입니다.

 

 

 

아까 얘기했다시피 1번, 2번, 3번 모두 "자기인식" 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깎아 내리는 것도 자기인식

 

남을 깎아 내리는 것도 자기인식

 

남을 깎아 내리는 자기인식으로 나를 깎아내리는 것도 자기인식 입니다.

 

 

결국 모든 화살이 나한테와요 싸펄ㅋㅋㅋㅋ

 

가불기에 걸려버린 것 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우월해지고 싶어서 더 많은 돈을 욕망하는 것도

 

내가 더 명예롭고 싶어서 남들을 비난하는 것도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면서 우월한 부분을 찾아내는 것도

 

내가 이렇게 희생하는데 왜 너는 나를 인정을 못해줘!! 라고 울부짓는 것도

 

운전을 조까치하는 3끼에게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도

 

남들과 비교해서 더 열등한 것을 찾아내는 것도

 

결국 전부 다~~ "자기인식"이 되어 돌아옵니다.

 

 

우월해지고 싶을 수록 열등해지고,

 

명예로워지고 싶어질수록 하찮아지고,

 

우월하고 싶어질수록 열등해지고,

 

인정을 갈구할수록 무시받고,

 

비난을 할수록 더 욕을 먹고,

 

열등함을 찾아낼수록 더 열등해지는...

 

무친 가불기에 걸려버립니다.

 

 

그래서 소유욕과 인정욕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 입니다.

 

여기서 이제 니체가 나오는데...

 

니체가 신은죽었다며, 내책은 훝날 미래에 성경이 될 것이다 라고 떠들고 다닐 때 사람들이

 

"풉키풉키 병1신ㅋㅋㅋ 뭐라냐ㅋㅋ 말이되는 소리를 해라"

 

라고 했고 니체는 그렇게 불명예스럽게 죽어버렸지만

 

훝날 정말로 현대 철학자들의 바이블이 되어버림ㅋ

 

 

 

니체는 인정욕구를 현시대의 놈들이 아닌 미래의 후손들에게 맡겼고

 

그는 3번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죽게되었습니다.

 

니체가 3번을 확실히 거부하는데 성공했는지는 내가 죽어서 니체한테 물어봐야 알겠는데

 

만약 니체를 예토전생시킨다음 현생을 보여주고

 

" 축하드립니다. 후손들을 당신을 인정하게 되었네요. "

 

라고 하면 니체는 뭐라고 할까요?

 

" 병1신들 ㅋㅋ 내가 맞았잖슴ㅋ "

 

이라고 할 수도 있고

 

" 그딴거 상관없어 병1신들아 "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 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저서에서 

 

" 자신을 너무 사랑하지 마라. 그러면 너는 타인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너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마라. 그러면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

 

라고 했고,

 

<선악의 저편> 이라는 저서에서는

 

"인정욕구는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인정욕구에 사로잡히면,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잃고, 타인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기인식과 인정욕구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했음을 미루어보아

 

" 병1신들 ㅋㅋ 대가 맞았잖슴ㅋ " 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됩니다.

 

그가 3번을 버리는데 성공했다면 저딴 소리를 할 필요가 없거든요.

 

따라서 니체는 짜라투스어쩌구에서 위버멘쉬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1번으로 돌아가자는 소리와 비슷합니다.

 

 

 

자 그렇습니다.

 

우리는 조절이라는 것을 해야합니다.

 

소유욕? 아예 버릴 수 없다.

 

이 부분은 제가 경험적으로 깨달았고, 무소유과 왜 절대다수에게 적용될 수 없는지 느낀 후

 

무소유전도사에서 덜소유구도자로 닉변을 했었죠.

 

인정욕도 마찬가지로 완전히 버릴 수 없습니다.

 

본능에 가까워서 이것은 조절의 영역이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소유욕보다도 인정욕이 더 먼저 발현되는 점을 미루어보아 알 수 있습니다.

 

저희집에 아들이 지금 18개월인데 19개월인가? 아무튼

 

애가 처음에는 1번이었어요.

 

" 밥내놔!! "

" 젖줘!! "

" 졸려!! "

 

근데 얘가 2번으로 넘어가더니 

 

내가 있으면 " 잘때까지 토닥여!! " 하며 생난리를 치고,

내가 없으면 ' 없나보다.. 어쩔수없네.. 걍 자야지. ' 하고 자는 것을 지나서

 

3번으로 넘어가서

 

자기가 하고싶은 걸 못하게 하려고 " 안돼! " 라는 명령문을 지시하자

 

하려고 했던 행동에 대한 인정욕구가 발동해서 " 아아아앙~~ 하게 해줘~~!!! " 하며 울어보리는 모습을 통해서

 

관찰하고 느껴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아기는 자기자신의 것, 엄마의 것, 아빠의 것을 명확히 구분해내지 못하고,

 

니꺼도 내꺼 내꺼도 내꺼라는 수준에 있지만 머지 않아

 

내게 더 많은 양식이 필요하며, 내가 배가 차지 않았으면 내게 할당된 양 이상을 탐하겠다는 소유욕도 발현될 것 같습니다.

 

아직은 그렇게 눈에 띄게 발현된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자체적으로 내린 결론은

 

인간 발달 과정에서 인정욕구가 소유욕구 보다 훨씬 빨리 발현되는 것으로 보아

 

밥먹고, 배부르고, 싸고, 자는 생존의 본능적인 욕구를 지나 인정에 대한 욕망이 발현되기에

 

매우 본능에 가까운 열망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유욕을 내다버리는 것보다

 

본능에 가까운 인정욕을 내다버리는 것이 훨씬 어려운 개념이라는 것이고,

 

인정욕구를 무인정으로 치환한다는 것은 소유욕을 무소유로 치환하는 것 보다 훨씬 어려운 개념이라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여러 철학자들이 말했던 것 처럼 이 인정욕구라는 것은 조절의 영역이고,

 

소유욕이라는 것은 최대한 덜어낼 수만 있을 뿐 아예 0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소유의 경지는

 

엄청난 수련이 필요하고, 무소유를 넘어 무인정의 상태에 다다르는 것이야 말로 저는

 

불교적 용어로 반야심경을 체화하여 열반과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더 이상 윤회가 필요없다. 라는 수준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따라서 현생인류의 절대다수는 웬만한 마음수련으로는 이 경지에 닿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였고

 

저 또한 니체와 같은 사견으로 인정욕구는 평생 조절하는 것, 소유욕 역시 덜소유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신념의 클리크를 고정하였습니다.

 

 

우리가 덜소유하고, 인정욕구를 조절하지 않으면 상기 언급했다시피

 

결국 가불기에 스스로의 인식으로 스스로를 뚜까패게 되는 그로기 상태에 이르게한다는 것을 검증했기 때문에

 

결국 인정욕구를 조절한다는 것은 더 존재하기 위한 길이라는 말과 대동소이하게 됩니다.

 

앞으로 여러분들도 굳이 자기파괴를 하고 싶지 않다면

 

이 길을 팔로우하는게 맞지않을까...요?

 

여전히 아니라고 우기시고 싶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이겠지요.

 

 

라는 결론이고요.

 

 

 

인정욕구를 조절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덜소유하고 더존재하시길 바랍니다.